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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ene+logue

2. "The moment seizes us" - 보이후드(2014)

by orossiwithu 2025. 9. 20.

[ scene+logue ] 스쳐간 장면에 머물러, 마음에 스민 이야기를 꺼냅니다.

두번째 장면은, 영화 '보이후드(Boyhood, 2014)'의 엔딩씬 입니다. 이 작품을 저는 2014년의 끝자락과 2015년의 시작, 두 번에 걸쳐 영화관에서 홀로 보았어요. 정확히 뭐라고 설명할 순 없지만, 그때의 무언가가 오래도록 마음속에 남아 있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아마도 영화를 본 그 순간 자체가 저를 붙잡았던 게 아닐까 싶어요. 오늘, 다시 그 순간을 불러보려 합니다. 

 

"The moment seizes us" - 순간이 우리를 붙잡는 시간

1. 프롤로그 (Scene Drop)

어떤 영화는 화려한 반전이나 극적인 사건 없이도 끝나고 나면 오래도록 마음을 흔듭니다.
〈보이후드〉의 마지막 장면이 제게는 그렇습니다.

엔딩에서 주인공 메이슨은 대학에 막 입학한 날, 낯선 친구들과 함께 언덕 위에 앉아 있습니다.
그리고 대화는 이렇게 흘러가죠.

- You know how everyone’s always saying, ‘Seize the moment’?
- I don’t know, I’m kind of thinking it’s the other way around. Like, 'the moment seizes us'.
- Yeah, it’s constant. The moments. It’s just... it’s like it’s always right now.”

 

“순간을 붙잡으라는 말이 있잖아. 나는 그 반대라고 생각해. 순간이 우리를 붙잡는 거지."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아. 시간은 늘 영원하잖아. 지금 이 순간이 되는 거지.”

 

우리는 늘 “순간을 잡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영화는 그 반대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순간이 우리를 붙잡는다는 것.
낯설게 들리지만, 곱씹을수록 더 솔직한 말처럼 느껴집니다.
살아가다 보면 내가 의도적으로 붙잡은 순간보다, 나를 강하게 사로잡은 순간들이 훨씬 또렷이 기억되니까요.
그래서 이 대사는 단순한 대화가 아니라, 성장과 시간에 대한 한 편의 시처럼 다가옵니다.


2. 정지화면 (Freeze Frame)

카메라는 언덕 위에 앉은 청춘들을 천천히 비춥니다.
햇살이 기울고, 공기는 조금 서늘하며, 얼굴에는 설렘과 두려움이 동시에 묻어납니다.
누구나 한 번쯤 가졌던 그 시절의 표정이죠.
앞으로의 길이 열려 있다는 건 벅찬 동시에 무겁습니다.
웃고 있지만 눈빛에는 긴장과 막연한 불안이 스칩니다.
바로 그 흔들림이 이 장면을 진짜로 만듭니다.

그리고 흐르는 노래, Family of the Year의 Hero.
잔잔한 기타 선율과 담담한 목소리,
“I don’t wanna be your hero”라는 가사가 묘한 울림을 줍니다.
세상이 요구하는 주인공, 영웅이 되기보다 그저 나로 남고 싶다는 고백.
영화 속 대사와 노래가 겹쳐지면서, 평범한 대화는 인생의 깊은 선언으로 바뀝니다.


3. 내면의 메아리 (Inner Echo)

이 장면을 떠올리면 저도 제 삶 속 몇 가지 순간이 함께 떠오릅니다.
첫 직장에서 마지막 야근을 끝내고 돌아오던 밤,
뜻하지 않게 찾아온 실패 앞에서 멍하니 서 있던 날,
아무렇지 않은 대화가 마음을 강하게 흔들어 놓았던 순간들.

돌이켜 보면 제가 붙잡은 게 아니라, 순간이 저를 붙잡아 두었습니다.
억지로 계획하고 만들어낸 기억보다, 불쑥 찾아온 장면들이 훨씬 오래 남더군요.
“오늘도 그냥 그런 하루였지”라고 넘겼던 날이, 돌아보면 내 삶을 바꾸는 전환점이 되어 있기도 합니다.

〈보이후드〉의 마지막 대사는 그 사실을 조용히 확인시켜 줍니다.
우리가 시간을 다스리는 것 같지만, 사실은 순간이 우리를 선택한다는 것.
그렇게 생각하면 인생은 커다란 목표를 향한 행진이라기보다, 우연히 다가온 순간들에 의해 모양이 바뀌는 여정일지도 모릅니다.


4. 겹쳐 읽기 (Cross Reading)

〈보이후드〉는 단순히 한 소년의 성장담을 보여주는 영화가 아닙니다.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무려 12년에 걸쳐 같은 배우들과 매년 조금씩 촬영을 이어갔습니다.
배우들이 실제로 나이를 먹고, 얼굴과 목소리가 변하는 과정이 고스란히 영화에 담겼죠.
그래서 이 작품은 허구이면서 동시에 다큐멘터리 같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흘러간다는 사실을, 그 흔적이 어떻게 사람의 몸과 표정에 스며드는지를 직접 보여줬으니까요.

철학자 베르그송은 시간을 단순히 시계로 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체험으로만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 질적인 시간을 ‘지속(durée)’이라 불렀죠.
〈보이후드〉는 바로 그 ‘지속’을 영화의 형식으로 구현한 실험이었습니다.

여기에 노래 Hero가 더해지며 메시지는 한층 선명해집니다.
세상은 늘 “네가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노래는 그저 ‘나답게 존재하는 것’의 가치를 전합니다.
순간이 우리를 붙잡는다는 영화의 대사와 절묘하게 맞물리면서, 삶은 반드시 특별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우리를 살짝 풀어줍니다.


5. 여운 (Aftertaste)

〈보이후드〉는 화려한 결말도, 거대한 드라마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게 이 영화의 힘입니다.
삶은 결국 특별한 사건보다, 평범한 순간들이 모여 만들어지니까요.

저는 영화를 보고 난 뒤 한동안 이런 질문을 품고 있었습니다.
“내가 붙잡은 게 아니라, 나를 붙잡아준 순간은 무엇이었을까?”

살면서 우리는 늘 “순간을 잡으라”는 말을 듣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그저 순간이 다가오길 기다리고, 그 순간에 온전히 몸을 맡기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결국 우리를 바꾸는 건 우리가 계획한 순간이 아니라, 우리 곁에 불쑥 다가와 마음을 사로잡아버린 순간이기 때문이죠.

어쩌면 삶이란 거대한 줄거리가 아니라, 작은 장면들이 우리를 완성해가는 영화일지 모릅니다.
하나의 순간이 우리를 붙잡아 주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고, 오늘의 어떤 장면도 언젠가 소중한 기억으로 다시 다가올 수 있습니다.

오늘도 그런 순간 하나가 여러분을 붙잡을지도 모릅니다.
애써 붙잡으려 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순간은 결국, 우리를 붙잡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