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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ene+logue

5. "The sound that lingers" — 라디오 천국, Last Train Home

by orossiwithu 2025. 9. 23.

[ scene+logue ] 스쳐간 장면에 머물러, 마음에 스민 이야기를 꺼냅니다.

다섯 번째 장면은, 영화 대신 음악입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유희열의 〈라디오 천국〉, 그리고 그 원곡처럼 다가왔던 Pat Metheny group의 〈Last Train Home〉. 가사는 없지만, 멜로디가 풍경을 만들어주었고, 그 풍경 안에서 한동안 멈춰 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은, 그 장면에 다시 머물러 봅니다.

"The sound that lingers" — 말 없는 선율의 여운

1. 프롤로그 (Scene Drop)

가끔은 음악이 한 편의 영화 장면처럼 마음을 사로잡을 때가 있습니다.
가사가 없는데도 이야기를 꺼내주고, 어떤 장면보다 선명하게 마음을 붙잡습니다.

 

저에게는 유희열의〈라디오 천국〉이 그렇습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첫 선율이 제 마음을 한순간에 고요하게 만들었어요.
그 순간, 이전에 들었던 팻 메스니 그룹의 〈Last Train Home〉이 함께 떠올랐습니다.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만들어진 곡이지만, 두 음악은 묘하게 닮아 있었습니다.

 

잔잔히 반복되는 리듬, 고요하게 이어지는 기타 톤, 그리고 말 없는 선율.
그 안에는 돌아오지 않을 저녁의 기차역 풍경 같은 것이 스며 있었고,
마치 시간을 붙잡는 듯, 저를 한동안 멈추게 했습니다.


2. 정지화면 (Freeze Frame)

눈을 감고 음악을 듣는 순간, 화면은 멈춰 있습니다.
느린 기타 선율은, 퇴근길에 본 회색빛 하늘을 닮아 있고,
부드럽게 깔린 신스 사운드는, 차창에 스치는 불빛처럼 흘러갑니다.

 

〈Last Train Home〉은 제목 그대로, 기차가 천천히 출발하는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규칙적인 드럼 브러시 소리는 레일 위 철로의 진동처럼 느껴지고,
가끔 튀어나오는 기타의 프레이즈는 창밖으로 스쳐가는 작은 마을 불빛 같죠.

 

〈라디오 천국〉은 같은 풍경을 한국적 정서로 번역한 듯 다가옵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올 법한 친근함,
그 안에서 묻어나는 ‘조용한 위로’의 기운.
마치 심야 라디오에 귀 기울이던 시절,
DJ의 목소리 대신 멜로디가 제 이야기를 들어주던 순간이 되살아납니다.

 

이 장면에서 시간은 흘러가지만, 제 마음은 오히려 고정되어 있습니다.
소리가 정지화면처럼 멈추어, 저를 한 장면 속에 가둬두는 것 같았습니다.


3. 내면의 메아리 (Inner Echo)

이 음악이 저에게 남긴 메아리는 언제나 “지나간 것들”이었습니다.
돌아오지 않는 저녁의 기차, 이미 지나가버린 하루,
다시 들을 수 없는 누군가의 목소리.

 

〈Last Train Home〉을 처음 들었을 때, 저는 기차를 자주 타던 시절이었습니다.
서울과 지방을 오가며, 늘 막차 시간에 쫓기듯 뛰어다녔죠.
기차가 출발하면, 창밖 풍경은 빠르게 흘러가지만, 제 마음은 늘 멈춰 있었습니다.
“이 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 감각이, 선율과 함께 마음에 새겨졌습니다.

 

시간이 흘러, 우연히〈라디오 천국〉을 들었을 때,
저는 이미 다른 삶의 국면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낯선 순간에도 음악은 익숙한 장면을 다시 불러냈습니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울리는 음악이, 잊었다고 생각한 기억을 꺼내어 보여주는 것처럼요.

 

이 곡들은 결국 같은 메아리를 남겼습니다.
“순간은 지나가지만, 그 흔적은 여전히 남아 있다.”


4. 겹쳐 읽기 (Cross Reading)

흥미로운 건, 이 두 곡이 단순히 닮았다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유희열은 〈라디오 천국〉을 만들면서 팻 메스니에게 존경의 마음을 담아 오마주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두 곡은 ‘원본과 변주’의 관계이면서도, 동시에 서로 다른 풍경을 담고 있습니다.

 

〈Last Train Home〉은 낯선 길 위에서 느끼는 고독,
그리고 세계의 끝자락에서 잠시 머무는 듯한 정적을 그립니다.
반면 〈라디오 천국〉은 더 개인적인 기억,
라디오를 매개로 했던 90년대 청춘들의 감성을 품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동일한 멜로디의 뼈대가, 시대와 문화, 언어의 차이에 따라 전혀 다른 정서를 불러낸 것입니다.
이것은 음악이 단순히 ‘소리’가 아니라, 시간을 기억하는 장치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기억은 이미지로 남지 않고, 순간의 잔향으로 남는다”고 말했습니다.
저에게 이 두 곡은 바로 그런 잔향이었습니다.
패트 메스니가 만든 잔향을, 유희열은 다시 라디오의 언어로 번역해 남겨 두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두 곡을 번갈아 들을 때마다, 같은 길을 다른 풍경으로 걷는 듯한 기분을 느낍니다.


5. 여운 (Aftertaste)

곡이 끝난 뒤, 방 안에는 잠시 정적이 남습니다.
하지만 그 정적조차도 음악의 일부처럼 느껴집니다.
*〈Last Train Home〉*이든, *〈라디오 천국〉*이든,
그 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감각을 남기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두 곡을 들을 때마다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지금 이 순간, 내 마음을 붙잡고 있는 장면은 무엇일까?”

 

우리는 늘 바쁘게 달려가지만, 사실 인생은 음악처럼 반복되는 리듬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가끔은, 아무 말도 없는 멜로디가 가장 많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가사가 없어도, 이 음악은 분명히 말합니다.
삶은 지나가지만, 그 순간은 우리 안에 남아 있다는 것을.
때로는 기차처럼 흘러가고, 때로는 라디오처럼 다시 흘러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