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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ilo+scop

18. 만남과 관계의 윤리 – 마르틴 부버와 디지털 시대의 ‘나와 너’

by orossiwithu 2025. 10. 18.

[ philo+scop ] 철학적 개념을 렌즈 삼아 현대사회의 현상과 일상을 해석합니다.

열여덟 번째 글은 마르틴 부버의 관계 철학을 바탕으로, 디지털 사회 속 인간 관계와 만남의 문제를 다룹니다. 부버는 인간의 삶을 ‘나-너(I-Thou)’의 만남과 ‘나-그것(I-It)’의 관계로 구분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SNS, 화상회의, 메타버스와 같은 공간 속에서 타자와 연결되지만, 이 만남이 진정한 ‘나-너’인지, 아니면 대상화된 ‘나-그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부버의 사상을 토대로 디지털 시대의 인간 관계를 성찰하고, 온라인 속에서 가능한 윤리적 만남을 모색합니다.

1. 서론: 디지털 사회와 관계의 위기
   1.1 온라인 연결과 고립의 역설
   1.2 마르틴 부버와 ‘나와 너’
2. 부버의 관계 철학
   2.1 ‘나-너’와 ‘나-그것’의 구분
   2.2 존재는 관계 속에서 드러난다
   2.3 만남의 순간성과 초월성
3. 디지털 시대의 관계 구조
   3.1 SNS 관계 – 끝없는 ‘좋아요’와 ‘팔로우’
   3.2 화상회의와 온라인 수업의 거리감
   3.3 메타버스 속 가상 자아와 만남
4. 문화적 사례
   4.1 영화 <그녀(Her)> – 인공지능과 ‘나-너’의 가능성
   4.2 드라마 <블랙 미러: 비하인드 더 아이즈> – 가상 공간의 진짜 만남?
   4.3 온라인 연애와 디지털 결속
5. 철학적 성찰
   5.1 디지털 시대의 ‘나-너’는 가능한가
   5.2 관계의 진정성과 타자의 환원 불가능성
   5.3 온라인 윤리와 책임의 문제
6. 결론: 디지털 만남을 다시 묻다

1. 서론: 디지털 사회와 관계의 위기

오늘날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 손 안의 스마트폰만 열어도 수십 명의 친구와 대화할 수 있고, 화상회의로 국경을 넘어 협업하며, 메타버스에서 낯선 이와 만난다. 그러나 동시에 사람들은 고립감을 호소한다. 관계는 풍부해졌지만, 만남은 얕아졌다. ‘관계의 홍수 속의 외로움’이 디지털 시대의 역설이다.

마르틴 부버는 이러한 상황을 예견한 듯 보인다. 그는 인간 존재를 ‘나와 너’의 만남 속에서 이해했다. 진정한 인간적 삶은 타자를 도구로 대하지 않고, 존재 그대로 마주할 때 열린다. 오늘날 우리의 온라인 관계는 과연 ‘나-너’일까, 아니면 대상화된 ‘나-그것’일까? 이 질문은 디지털 사회에서 관계를 새롭게 성찰하게 만든다.


2. 부버의 관계 철학

2.1 ‘나-너’와 ‘나-그것’의 구분

부버는 인간의 관계를 두 가지로 나누었다. ‘나-그것’ 관계는 타자를 객체로 대하는 방식이다. 우리는 타인을 수단, 정보, 숫자로 환원한다. 반면 ‘나-너’ 관계는 타자를 있는 그대로, 대체 불가능한 존재로 만나는 방식이다. 여기에는 대상화가 없고, 오직 상호적이고 인격적인 만남이 있다.

디지털 사회의 문제는 많은 만남이 ‘나-그것’으로 전락한다는 데 있다. 우리는 타인의 게시물에 좋아요를 누르고, 필요할 때만 메시지를 보낸다. 알고리즘은 타인을 취향의 데이터로 분석하고, 추천 엔진은 관계를 통계적 확률로 환원한다. 이런 상황에서 부버의 ‘나-너’는 점점 설 자리를 잃는다.

2.2 존재는 관계 속에서 드러난다

부버에게 인간은 고립된 자아가 아니라, 관계적 존재다. 우리는 타자와 만남 속에서 비로소 자신을 알게 된다. 이는 “나는 관계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새로운 존재론적 선언으로 읽을 수 있다.

이 관점에서 보면, 온라인 공간의 관계가 단순히 가짜나 피상적인 것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어떤 순간, 우리는 디지털 대화 속에서 진심을 나누고, 문자 너머로 깊은 공감을 경험한다. 관계의 질이 문제이지, 매체 자체가 관계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부버의 사상은 “디지털에서도 진정한 만남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가능성의 여지를 열어 준다.

2.3 만남의 순간성과 초월성

부버는 진정한 만남을 순간적 사건으로 보았다. ‘나-너’의 만남은 계산과 계획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연과 은총처럼 다가온다. 이 순간에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무너지고, 인간은 세계와 신성한 차원과도 연결된다.

오늘날 디지털 공간에서도 이런 ‘순간성’은 가능하다. 예컨대 낯선 사람과의 짧은 대화가 예상치 못한 위로를 주거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공통의 아픔을 공유하며 깊은 유대감을 경험하는 경우가 있다. 문제는 이 순간들이 얼마나 자주, 얼마나 진정성 있게 나타나는가이다.


3. 디지털 시대의 관계 구조

3.1 SNS 관계 – 끝없는 ‘좋아요’와 ‘팔로우’

SNS 관계는 표면적으로 풍부해 보이지만, 많은 경우 ‘나-그것’의 방식이다. 우리는 타인을 진정한 타자가 아니라, ‘좋아요’ 숫자와 콘텐츠 소비의 대상으로 바라본다. 프로필 속 이미지는 진짜 ‘너’가 아니라, 가공된 ‘그것’이다.

특히 인플루언서 문화는 관계의 왜곡을 보여준다. 팔로워는 수십만 명이지만, 그 관계는 일방적이다. 팬과 크리에이터 사이에는 실제 만남이 아니라, 이미지와 정보의 소비가 있을 뿐이다. 타자는 너가 아니라, 브랜드화된 존재로 환원된다.

3.2 화상회의와 온라인 수업의 거리감

코로나19 팬데믹 동안 우리는 화상회의와 온라인 수업을 통해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이 만남은 물리적 현존의 결핍을 드러냈다. 화면 속 얼굴은 존재의 깊이를 전달하지 못했고, 관계는 효율적이지만 얕았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온라인을 통해 새로운 연대와 만남도 경험했다. 원격 근무는 지리적 장벽을 허물었고, 온라인 강의는 교육의 기회를 넓혔다. ‘나-너’의 만남은 여전히 부족했지만, 디지털 관계가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한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3.3 메타버스 속 가상 자아와 만남

메타버스는 새로운 관계의 장을 열었다. 아바타를 통해 타자와 만나는 경험은 진정한 ‘나-너’일까? 아니면 단순한 가상의 ‘나-그것’일까? 메타버스의 관계는 여전히 타자의 현존을 결여한 채, 시뮬레이션된 만남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일부 사례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메타버스를 통해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거나, 전통적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이 가상 공간에서 공동체를 찾는 경우가 있다. 즉, 메타버스 역시 ‘나-너’의 관계를 완전히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4. 문화적 사례

4.1 영화 <그녀(Her)> – 인공지능과 ‘나-너’의 가능성

주인공은 인공지능 운영체제와 사랑에 빠진다. 이는 진정한 ‘나-너’일까? 아니면 ‘나-그것’을 착각한 것일까? 타자가 알고리즘으로 작동한다는 점에서 이는 진정한 만남이라기보다는 프로그래밍된 환상일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영화는 인간이 관계를 얼마나 갈망하는지를 드러낸다. 진정한 만남이 결여된 세계에서, 인간은 인공지능마저 ‘너’로 착각한다.

4.2 드라마 <블랙 미러: 비하인드 더 아이즈> – 가상 공간의 진짜 만남?

이 드라마는 가상 공간 속에서 다른 이의 의식을 체험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여기서 만남은 신체와 의식을 넘어선다. 그러나 여전히 진짜 타자의 불가해성과 대면의 순간은 결여된다. 진짜 만남은 대체 불가능하며, 그 공백은 어떤 기술로도 채워지지 않는다.

4.3 온라인 연애와 디지털 결속

온라인 연애는 현대 사회의 보편적 현상이 되었다. 그러나 실제 만남 이전까지 상대는 이미지와 텍스트의 조합일 뿐이다. 관계의 진정성은 결국 현존의 만남 속에서 검증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온라인 연애 역시 부버적 관점에서 완전히 ‘나-그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어떤 경우에는 진실한 대화와 교류 속에서 깊은 ‘나-너’의 관계가 싹트기도 한다.


5. 철학적 성찰

5.1 디지털 시대의 ‘나-너’는 가능한가

부버의 철학은 묻는다. 온라인 공간에서도 진정한 ‘나-너’가 가능한가? 대면의 깊이를 대신할 수 없지만, 때로는 문자와 목소리로도 깊은 관계가 형성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타자를 도구로 대하지 않으려는 태도’다. 만약 타자를 수단이 아니라 존재로 존중한다면, 디지털에서도 ‘나-너’는 열린다.

5.2 관계의 진정성과 타자의 환원 불가능성

타자는 결코 나의 욕망이나 이미지로 환원될 수 없다. 디지털 사회에서도 이 원칙은 중요하다. 타자를 단순히 콘텐츠 생산자, 팔로워, 소비자로만 대하지 않고, 대체 불가능한 존재로 존중할 때 ‘나-너’가 열린다. 이는 특히 익명성이 강한 온라인 공간에서 더욱 절실하다.

5.3 온라인 윤리와 책임의 문제

디지털 관계의 특수성은 책임의 회피를 쉽게 만든다. 익명성 속에서 우리는 타자를 쉽게 대상화하거나 상처 입힐 수 있다. 따라서 디지털 윤리의 핵심은 ‘타자를 타자 그대로 존중하는 책임’이다. 사이버 폭력과 혐오 발언은 ‘나-그것’ 관계의 극단적 형태이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관계의 윤리가 반드시 필요하다.


6. 결론: 디지털 만남을 다시 묻다

부버는 인간 존재의 본질을 ‘만남’ 속에서 찾았다. 오늘날 디지털 사회에서 우리는 수많은 만남을 경험하지만, 그중 얼마나 진정한 ‘나-너’인가를 물어야 한다.

디지털 기술은 타자와의 관계를 풍부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얕고 대상화된 만남을 확산시키기도 한다. 결국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태도로 타자를 만나는가에 달려 있다.

결국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온라인 관계 속에서 타자를 도구로 대하지 않고, 진정한 ‘너’로 만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