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hilo+scop] 철학적 개념을 렌즈 삼아 현대사회의 현상과 일상을 해석합니다.
서두
우리는 매일 수많은 선택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선택은 종종 나의 의지라기보다 알고리즘의 배열, 사회적 압력, 관계적 기대 속에서 이루어진다. 스크롤을 내리면 보이는 콘텐츠에 반응하고, 누군가 보낸 메시지에 감정이 흔들리고, 알고리즘이 추천한 영상이나 글이 우리의 관심을 결정한다. 선택은 더 이상 ‘내가 만든 것’만은 아니다. 그런데 철학자 알랭 바디우(Alain Badiou)는 이런 일상적 선택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선택을 말한다. 그는 인생을 결정적으로 바꾸는 순간을 ‘사건(Event)’이라고 부르며, 이 사건은 예측할 수 없고,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며,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내가 만들어지는 계기라고 설명한다.
오늘 우리는 바디우의 ‘사건’을 통해 디지털 시대의 진정성에 대해 생각해본다.
내가 스스로 선택했다고 믿는 것들, 알고리즘이 대신 선택해주는 것들, 그리고 정말 삶을 바꾸는 ‘사건’ 같은 것들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다시 구성하는지 살펴본다.
1. 바디우의 ‘사건(Event)’이란 무엇인가
바디우에게 사건이란 기존 질서로는 설명될 수 없는 변화의 틈이다.
✔ 사건의 특징
- 예측 불가능하다
- 기존 체계에 ‘균열’을 만든다
- 기존의 ‘나’를 유지할 수 없게 만든다
- 그 사건을 받아들일지 말지는 전적으로 주체의 선택이다
- 사건을 받아들이면 새로운 진리가 생성된다
바디우는 사랑, 정치적 혁명, 예술적 창작, 과학적 발명 등을 대표적 사건으로 언급한다.
예를 들어
갑자기 만난 사람과의 대화가
내 삶 전체를 바꾸는 계기가 되기도 하고,
한 권의 책, 우연처럼 보였던 길의 선택,
어떤 통찰이 갑자기 찾아오는 순간이
삶을 갈라놓는다.
이때 중요한 건 사건 그 자체보다
그 사건을 ‘나의 진실’로 받아들이는 선택이다.
바디우는 이것을 충실성(Fidelity)이라고 부른다.
사건이 일어난 뒤, 그 사건이 주는 진실에 얼마나 충실하게 머무르는지가
그 사람의 삶을 바꾼다고 본다.
2. 디지털 시대는 왜 ‘사건’을 잃어가고 있는가
현대 사회는 ‘사건’을 회피하거나 희미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알고리즘은 예측 가능성을 기반으로 작동하고,
사건은 예측 불가능성을 통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① 알고리즘은 틈을 없앤다
우리가 보는 콘텐츠, 읽는 글, 듣는 음악은
취향 기반으로 계속 맞춰진다.
낯선 것을 마주할 가능성은 줄어들고,
새로운 진실을 발견할 기회도 좁아진다.
→ 익숙함의 반복
→ 사건이 침투할 틈이 사라짐
② 무한한 선택 = 진짜 선택의 상실
디지털 시대는 선택의 폭이 넓어서 자유롭다고 말하지만,
사실 선택의 수가 많아질수록
우리는 더 자주 ‘자동 반응’을 한다.
알고리즘이 대신 선택해주는데
그 선택에 우리가 익숙해진다.
이 구조 속에서
“내가 선택했다”는 환상만 남게 된다.
③ 감정의 즉각성 + 관계의 일시성
사건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현대는 빠른 감정, 빠른 대화, 빠른 관계를 요구한다.
- 깊이 없는 연결
- 즉시 반응
- 빠른 소모
이 모든 것은
‘사건의 여운’이 자리 잡을 공간을 없앤다.
④ 디지털 자아의 다층성은 진실을 분산시킨다
SNS의 나, 관계 속의 나, 일상의 나, 온라인의 나…
정체성은 여러 층으로 분해된다.
이때 어떤 사건이 ‘진짜 나’에게 일어나는가가 애매해지고,
사건은 증발해버린다.
3. 바디우의 사건으로 디지털 자아를 다시 보기
바디우는 사건을 통해 우리가 진짜로
“나의 삶을 다시 선택하는 순간”을 만든다고 말한다.
디지털 시대의 우리에게 이 ‘다시 선택하기’는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① 사건은 알고리즘을 벗어나는 순간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가끔 아주 작은 계기로
알고리즘 밖의 무언가와 마주한다.
- 예기치 않은 대화
- 누군가의 질문
- 우연히 펼친 책의 한 문장
- 불편하지만 마음을 건드리는 뉴스
- 스스로도 이유를 모르는 감정
이런 순간이 사건의 시작이 된다.
그 순간을 받아들일 것인지, 지나칠 것인지는
바디우가 말한 “충실성”에 달려 있다.
② 사건은 ‘새로운 나’를 요구한다
사건은 기존의 나를 해체하는 힘이 있다.
그래서 불편하고, 그래서 중요하다.
사건 이후의 나는
사건 이전의 나와 같을 수 없다.
그 변화가 바로 진정성의 시작이다.
③ 사건은 관계를 변형시킨다
디지털 시대의 관계는 쉽게 연결되고 쉽게 끊어진다.
그러나 바디우의 관점에서
사건이 일어나는 관계는 단순한 친밀함이 아니라
‘진실의 생성’이다.
사람을 만나고, 경험을 하고, 관계가 흔들리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진실이 태어난다.
4. 사건을 경험하기 위한 조건 — 바디우가 말한 “충실성”
바디우는 사건을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진실을 향한 헌신이라고 본다.
충실성은 네 가지 방식으로 작동한다.
① 이름 붙이기(Nomination)
사건을 사건이라고 인식하고
그 순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
② 지속성(Continuation)
쉽게 포기하지 않는 것.
사건 이후의 삶은 흔들리고 복잡해진다.
충실성은 그 복잡함을 견디는 용기다.
③ 확장(Extension)
사건이 준 통찰을
삶의 다른 영역에도 적용하는 것.
예를 들어
사랑에서 배운 진실을
일, 인간관계, 선택에도 확장하는 방식.
④ 변형(Transformation)
사건이 결국 나를 바꾸는 단계.
이 지점에서 우리는
‘사건 이후의 나’라는 새로운 정체성에 도달한다.
디지털 시대의 우리는
이 네 단계 모두를 거칠 공간을 다시 마련해야 한다.
5. 영화로 보는 사건 — <이터널 선샤인>과의 연결
여기서 영화 <이터널 선샤인>(2004) 은
바디우의 사건 개념을 설명하기에 적합한 예시다.
영화 속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서로의 기억을 지우지만,
우연한 재회는 다시 ‘사건’을 불러온다.
기억이 사라져도, 사건은 남는다.
왜냐하면 사건은 ‘사건 이전의 나’로 돌아가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그들이 다시 사랑을 선택했다는 점이다.
사건은 그렇게 ‘다시 선택’의 형식으로 돌아온다.
6. 디지털 시대의 진정성을 위한 질문
우리는 사건을 잃어버린 시대에 살고 있다.
모든 것이 알고리즘화되고,
세상은 우리의 취향을 예측하고,
관계는 밀도보다 속도를 우선시한다.
이런 시대에서 사건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 나는 정말로 이 선택을 스스로 하고 있는가?
- 어떤 순간이 나를 바꾸었는가?
- 나는 내 삶의 진실을 어디에서 찾는가?
- 사건 이후 나는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
- 나는 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일 용기가 있는가?
진정성은 결국
“내가 살아가는 삶이 나의 선택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된다.
결론 — 사건은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하는 균열이다
바디우는 말한다.
“사건이 없다면 주체도 없다.”
우리는 사건을 통해 다시 태어나는 사람들이다.
디지털 시대의 가장 큰 과제는
이 사건을 잃지 않는 것이다.
- 알고리즘이 제공하는 익숙함을 벗어나
- 예측할 수 없는 순간을 받아들이고
- 그 순간을 나의 진실로 만들며
- 그 진실에 충실하게 사는 것
그때 비로소
우리는 다시 삶의 방향을 선택할 수 있다.
사건은 거창하지 않다.
작은 균열 속에서 시작된다.
그 균열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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