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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ene+logue

16. "I can't beat it" – 맨체스터 바이 더 씨(2016)

by orossiwithu 2025. 10. 15.

[ scene+logue ] 스쳐간 장면에 머물러, 마음에 스민 이야기를 꺼냅니다.

열여섯 번째 장면은, 영화 〈Manchester by the Sea(2016)〉입니다.
이 영화는 상실과 죄책감, 그리고 인간이 끝내 감당하지 못하는 고통의 무게를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리 챈들러는 과거의 비극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동생의 죽음과 조카의 미래까지 짊어지게 됩니다.

그는 사랑하는 조카를 품고 싶지만, 동시에 스스로를 벌하는 사람처럼 맨체스터라는 공간에 갇힙니다.
“I can’t beat it.” (나는 이겨낼 수 없어.)
짧지만 강렬한 이 대사는, 인간의 한계와 고통이 지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오늘은, 그 장면에 다시 머물러 봅니다.

 

"I can’t beat it" – 치유되지 않는 삶의 무게

1. 프롤로그 (Scene Drop)

리 챈들러는 동생 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며 맨체스터로 돌아옵니다.
조카 패트릭의 후견인이 되어 달라는 유언이 그를 고향으로 불러들입니다.

 

그러나 고향의 바다는 그에게 따뜻한 품이 아닙니다.
그곳은 과거의 화재, 되돌릴 수 없는 실수,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기억이 여전히 살아 있는 공간입니다.

 

눈 덮인 거리.
바닷바람에 스치는 오래된 집들.
웃음 대신 고통을 불러내는 풍경.

 

조카 패트릭은 아직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었지만, 어쩌면 삼촌보다 더 씩씩해 보입니다.
야구 연습을 하고, 밴드 연주를 하고, 여자친구와 미래를 이야기합니다.

 

반면 리는 숨을 고르듯 하루를 버티고 있을 뿐입니다.
조카에게 미소를 보여주지만, 그 안에는 자책과 공허함이 깔려 있습니다.
그는 가족을 잃은 날 이후, 사실상 살아남은 사람이 아니라 멈춰 있는 존재입니다.


2. 정지화면 (Freeze Frame)

결국 리는 한순간 고백합니다.
“I can’t beat it.” (나는 이겨낼 수 없어.)

 

카메라는 그의 어깨와 얼굴을 오래 잡습니다.
피곤에 젖은 몸.
꾹 다문 입술.
희미하게 흔들리는 눈빛.

 

그의 고백은 단순히 나약함의 표현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상처 앞에서,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는 말입니다.

 

정지된 화면을 바라보면, 이 말이 던지는 무게가 더욱 크게 다가옵니다.
극복하라는 말, 잊으라는 말, 다시 시작하라는 말.
그 모든 사회적 요구가 얼마나 잔인한지, 리의 표정은 증언합니다.

 

모든 상처가 치유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기억은 평생을 따라다니고, 어떤 고통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리의 얼굴은 바로 그 불가능성을 담고 있습니다.


3. 내면의 메아리 (Inner Echo)

이 대사는 우리 안에서도 메아리처럼 울립니다.

 

우리는 늘 “이겨내야 한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정말 모든 고통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사랑하는 이를 잃은 상실.
되돌릴 수 없는 실수.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기억.

 

그 앞에서 우리는 무력해집니다.

 

리의 고백은 패배가 아닙니다.
오히려 솔직한 인정입니다.

그는 상처를 지울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입니다.
그럼에도 살아가려는 몸부림을 멈추지 않습니다.

 

이겨내지 못해도 됩니다.
살아가는 것 자체가 이미 버텨내는 방식이니까요.

 

리와 조카가 함께하는 일상은 그 증거입니다.
아침 식탁의 어색한 대화, 차를 함께 타고 가는 침묵.
그 사소한 순간들은 고통 속에서도 삶을 이어가는 방법을 보여줍니다.


4. 겹쳐 읽기 (Cross Reading)

라캉의 이론에서 인간은 근본적으로 ‘결핍’을 안고 살아갑니다.
리의 삶은 그 결핍의 극단을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가족의 상실은 대체할 수 없고, 상징으로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는 결핍을 지우려 하지 않습니다.
그저 결핍과 함께, 멈춰 있는 듯한 삶을 살아갑니다.

 

푸코의 시각으로 본다면, 리의 고백은 사회가 강요하는 담론에 대한 저항처럼 보입니다.
사회는 늘 말합니다.
“극복하라, 강해져라.”
하지만 리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의 말은 약점이 아니라, 새로운 생존 방식의 선언입니다.
나는 강해지지 못하지만, 살아는 간다.
나는 극복하지 못하지만, 여전히 존재한다.

 

심리학적으로 본다면 이는 트라우마와 공존하는 방식입니다.
치유되지 않는 상처와 함께,
여전히 숨 쉬고, 일하고, 관계 맺는 삶.
리의 태도는 완전한 치유가 아니라 불완전한 지속을 보여줍니다.

 

그 불완전함이야말로 진실합니다.
그것이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5. 여운 (Aftertaste)

〈Manchester by the Sea〉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모든 고통은 반드시 극복해야 하는가?”

 

리의 대답은 명확합니다.
아니라는 것.

 

그는 여전히 죄책감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는 여전히 불행합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살아갑니다.

 

영화의 마지막, 그는 조카와 바닷가를 걷습니다.
바다는 여전히 차갑고, 과거는 여전히 무겁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걷습니다.

 

“I can’t beat it.”
그의 말은 절망의 종착점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입니다.

 

완전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상처를 안고 있어도 괜찮습니다.
삶은 그렇게, 계속 이어집니다.

 

〈Manchester by the Sea〉는 결국 이렇게 속삭입니다.
극복이 아닌 공존.
치유가 아닌 지속.
그 불완전함 속에서도 우리는 살아갈 수 있다고.